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문단 편집) == 전쟁 이후 == 다이 비엣에 대한 3차례의 공격이 모두 실패하자 분노한 쿠빌라이는 토곤이 아비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면서 남방의 양주(扬州)로 쫓아낸 뒤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한편 아이로는 전우인 정붕비와 함께 쿠빌라이의 분노를 피해 도망쳐 먼 시골로 갔으나 3차 원정 당시 걸린 풍토병으로 인한 심한 기침 증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잡혀갔던 원나라 군은 석방되었으나 일부 장수나 장병들은 그냥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정착해 살기도 했다. 쩐 조정 역시, 승자이기는 했으나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끊었던 원나라 조정에 대한 공물을 다시 바치며 쿠빌라이를 달랬다. 한편, 살아남은 우마르는 다이 비엣에 있었고 명장인 덕인지 좋은 대접을 받았고, 원나라와의 화친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려보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쩐 구옥뚜안은 그가 용맹하면서도 잔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원나라로 돌려보내기보다는 죽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는 귀국할 날짜가 되자 우마르에게 배를 돌려주었으나 '약간의 하자'를 낸 채로 돌려주었고 결국 그 배는 밤새 침몰하여 우마르는 결국 바닷속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당연히 쩐 구옥 뚜안은 철수 중이던 토곤에게 서신을 보내 '오마니(우마르)를 배에 태워 돌려보냈으나 배가 침몰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토곤의 입장에서는 이미 싸움에서 진 입장인데다 우마르의 배가 이미 바닷속에 가라앉은터라 확인할 수도 없어 화도 못 내고 그냥 넘겼다. 쿠빌라이는 이 때의 패배가 너무 치욕스러웠는지 아직도 다이 비엣 정복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1289년 3월 10일에 성도(成都)의 군대를 통솔하는 유덕록(劉德祿)이 사천(四川) 지역에서 곧바로 다이 비엣을 공격할 수 있게 원나라 남서부의 여러 부족들에게서 5,000의 병력을 징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기뻐하며 윤허하고 유덕록을 사령관에 임명한 뒤 사천의 병력 1만 명을 주었다. 3차 원정 당시 해전에서 무참히 깨진 기억 때문인지 쿠빌라이는 사천에서 다이 비엣의 북서부 방향으로 진격해 기병의 우수함을 살리고, 최대한 해전을 피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던데다 북방이 안정되지 않았고 특히 원나라와 본격적인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카이두|카이두(海都)]]가 급부상함으로서 더 이상 남쪽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 쿠빌라이는 자신에게 안겨준 패배의 충격이 너무나도 컸는지 1293년에 4차 침공을 계획했다. 당시 바투르(拔都), 즉 영웅으로 불리던 유국걸(劉國杰)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56,570명의 군대와 35만 섬의 식량, 그리고 70만개의 무기를 포함한 1,000여척의 수송선을 동원하고 다이 비엣의 군대가 다시 집결하지 못하도록 트엉뜨(上思)의 부족장이었던 황 탄 흐어(皇 聖許)가 반란을 일으켜 응처우(雍州)를 공격하도록 하는 밑밥작업까지 세웠을 정도. 하지만 결국 그 계획은 쿠빌라이 본인이 사망함으로써 이뤄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방 원정 자체가 국가 재정을 뒤흔들 정도의 일인데다 후계자인 [[성종(원)|올제이투 칸]]은 할아버지가 3번이나 실패한 남방 정벌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